선발 투수에게 WPA는 필요한가?

WPA는 구원 투수의 승리 기여도를 평가하기에 매우 유용한 스탯이다. 기대 승률(WE)이 낮은 상황에서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타자를 병살타 또는 삼진아웃으로 처리하며 기대 승률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감동적인 장면. 이를 정량적인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WPA는 구원 투수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그런데 선발 투수의 WPA를 보는 것은 어떨까? 최근에는 WPA 스탯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선발 투수의 WPA를 참조하여 선수를 평가하는 일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도 나름 의미있는 것일까?

별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WPA는 생각보다 선발 투수의 퍼포먼스 또는 기여도를 별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선발 투수가 등판한 상황(득실점이 발생한 타이밍)에 크게 의존적이다. 간단한 예로 9이닝을 던져 1실점만을 기록한 투수의 WPA를 계산해보자. (계산 시 Tom Tango의 득실점차에 따른 기대 승률 테이블을 참조하였다.)

0:0으로 팽팽한 경기에서 9회초에 A 투수가 1실점을 기록하고 마쳤다고 하자. 그럼 그는 8회까지 +.543의 WE를, 9회에 -.306의 WE를 기록해 총 +.237의 WPA를 기록하게 된다. 반면 상대편 B 투수는 9이닝 완봉을 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237+.500=.737의 WPA를 기록한다. 두 투수는 거의 비슷하게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으나 WPA로는 차이가 매우 크다.

그렇다면 이번엔 A 투수가 9회초가 아니라 9회말에 1실점을 기록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는 8회까지 동일하게 .543의 WE를, 반면 9회말에는 -.366의 WE를 기록한다. WPA는 +.177이 되며, 반면 완봉한 B 투수는 .177+.500=.677가 된다. A 투수는 똑같이 9이닝 1실점을 하였으나 WPA는 +.237과 +.177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이 차이는 실점이 몇 회에 발생했느냐, 당시 스코어가 어땠느냐에 따라 매우 크게 변한다.

결국 선발 투수의 WPA라는 것은 본인의 피칭 퍼포먼스 자체보다는 당시의 득점 상황에 의존적이며, 결정적으로 승리팀의 투수였느냐가 중요한 변수이다.(스탯의 정의에 의해서 승리팀의 투수는 패배팀의 투수보다 +.5의 WPA를 기록한다.) 따라서 선발 투수의 WPA를 확인한다는 것은 그가 등판했을 때 팀이 얼마나 자주 이겼느냐를 확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투수의 승/패 스탯의 결점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선발 투수의 WPA는 실제 투수의 승리 기여도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실제 승리 기여도는 WAR 또는 WAA(평균 대비 승리 기여도)로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장기간 누적되면 WPA의 유용성은 매우 떨어진다. 클레이튼 커쇼의 성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그는 현재까지 27.6의 누적 WPA를 기록하였다. 한편 9이닝당 2.65점을 실점하였는데, 파크팩터 조정을 하면 대략 2.76점이다. 리그 평균은 약 4.5점이므로 그는 9이닝당 4.5-2.76=+1.74점을 기여한 것이고, 그가 지금까지 던진 1611이닝으로 환산해보면 총 311점을 기여한 것이다. 10점을 1승으로 환산하면 평균보다 대략 31승을 더 기여한 것이다. 실제 WPA는 이것보다 약 3~4승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유사한 수준이다. 아마도 그의 커리어가 늘어날 수록 WPA와 WAA는 점점 더 비슷해질 것이다.

결국 선발 투수를 평가하기 위한 목적으로 WPA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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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늅늅이

    9회까지 0:0으로 팽팽했던 경기에서, 잘던지던 투수가 한번 삐끗해서 1실점을 한다면, 그건 그만한 큰 실책이 아닐런지요? 물론 상황에 의존적인것은 맞으나, 해당 경기에 한해 그보다 더 확실한 지표가 있을까요?

    • suxism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게 9이닝 1실점한 투수가 4~5실점 하면서 이긴 투수나 구원 등판으로 1이닝만 던진 투수보다 낮게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이 평가지표로서는 큰 문제입니다. 차라리 그냥 해당 투수의 승/패를 봐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ㅎㅎ